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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과 청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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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과 청렴
  • 김성민 기자
  • 승인 2017.10.11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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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북부보훈지청 김희란 보상팀장

우리 역사속의 청렴한 인물로 황희, 맹사성 등 유명하신 분들도 계시지만 오리정승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오리 이원익정승도 있다.

이 분은 40여년간 대신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집 한 채가 없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다가신 분이셨으며 여주와 금천의 허술한 초가집에서 지내면서도 편안히 여겼다고 한다. 
실록에 기록된 사관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이때에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여 한 점의 흠이 없는 자는 참으로 많이 얻을 수가 없었지만, 이원익 같은 사람은 성품이 충량하고 적심(赤心)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奉公)하는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사적인 것을 영위하지 않았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의식(衣食)이 넉넉지 못하여 일생 동안 청빈했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인데도 홀로 태연했다”

돌아가실 때 장례 비용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서 인조는 “정승 40년에 그토록 가난했단 말인가?” 라며 관을 짤 나무와 장례비용을 하사했다고 하니 얼마나 공직자로서 청렴한 삶을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그의 청렴한 삶 속에 돋보이는 모습이 ‘지조’와 ‘고집’이다. 

황해도 안주목사 시절에 ‘양잠(뽕을 심어 누에 치는 것)’을 확산시키며 업적을 세우기도 했고, 임진왜란 시절에는 평안도로 파견되어 관찰사 겸 순찰사로서 평양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우는 한편, 이때 이순신 장군을 끝까지 옹호하기도 했다. 광해군 때 임해군 처형을 반대하며 23회나 사직했고, 결국 윤허를 받아내 낙향에 이르고 2년 후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했으나, 이때에도 국왕의 시책에 반대했고 인목대비 폐출에도 반대해 여주 지역으로 4년 간 유배 시절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인조가 즉위한 뒤에도 영의정으로 임명되나 이때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이원익 정승은 이처럼 야욕있는 정치가가 아닌 모범적인 관료로서의 생활을 했으며 관료로서의 지조와 고집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청렴한 삶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자리에 욕심이 있고, 재물에 욕심이 있었다면 어찌 공직자로서 지조와 고집을 펼칠 수 있었으랴. 공직자로서 우리가 지금 오리 이원익 정승과 같은 청렴한 삶을 똑같이 따라하며 살 수는 없을지라도 자기가 하고 있는 업무에 자긍심을 가지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직자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살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청렴한 삶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청렴이라는 것은 그저 정직함, 깨끗함을 뜻하는 것이 아닌 공직자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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