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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6.25 전쟁 상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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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6.25 전쟁 상기하자
  • 조성삼 기자
  • 승인 2016.06.2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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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삼 기자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1950년6월25일 새벽 인민군의 남침으로 1950년 6원24일 1사단 사령부는 직할대, 제11연대, 제6야전포병대대와 함께 수색에 주둔하였다. 제12연대는 좌전방인 청단-개성-대원리 간 38도 분계선의 경계를, 제13연대는 문산-고랑포 일대의 경계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1사단 정면에서는 인민군의 활동이 거의 관측되지 않았으며, 공격징후도 포착되지 않으므로 사단에서는 6월 24일에 병력의 약1/3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1/3범위 내에서 외출·외박을 실시하였다. 더구나 장비의 대부분을 후방으로 보낸 상태였고 사단장이 6.14일부터 시흥보병학교 고급 지휘관 과정에 입교 중이어서 제11연대장이 대리근무를 하고 있었다.

개전 후 1사단은 비교적 선전했다. 그렇지만 전선에서의 주도권은 이미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1사단역시 26일 오전 방어선을 포기하고 위전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 점령하의 파주는 개전3일만에 1950년 6월28일 파주전역이 인민군에게 완전 점령당하고 말았다. 개전직후 인민군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한 주민도 있었으나 인민군의 진격속도가 그들을 앞질렀기에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지하에 잠복해 있던 파주지방의 좌익들은 인민군이 진주하자 인공기를 게양하고 그들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이후 10월1일 미 해병대가 파주를 진격해올 때까지 96일간 파주는 인민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북한의 남한정책은 1946년3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발표한 20개 정강이 그 골간이 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일제 잔재의 청산, 우익정당 및 인사의 정치활동 금지, 인민위원회 구성, 새로운 법률제도의 확립, 운수·은행·광산 등 대기업의 국유화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에 기초에 토지개혁의 실시, 의무교육의 실시, 8시간노동제 실시 및 단일 세금제도의 실시 등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선전활동·의용군 모집·전선원호사업 등 전반적인 점령정책을 집행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인민군의 파주점령 초기에는 학살이 없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민군과 자위대·치안대의 청년들이 집을 수색하여 반공인사와 국군낙오병 그리고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사람들을 잡아 사살했다.

파주에서의 민간학살 대부분은 이시기, 즉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9.28서울 수복을 전후하여 일어났다.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와 당시 학살을 겪은 주민들에 증언에 의하면 대표적인 학살사건을 살펴보면, 1950년8월 하순 파주 파평면 두포리 산38번지에서 수백명이 집단 학살되었다. 패주하던 인민군이 이곳에 이르러 납치해가던 사람들과 주민들을 대량 사살하였다는 내용이 이곳에 세워진 6.25반공위령탑에 기재되어있다.

그리고 임진면 마정리 임진강의 갑바위(현 임진각)에서 도 집단학살사건이 일어났다. 후퇴하던 인민군이 이곳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유엔군의 포격으로 다리가 파괴되어 나룻배로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인민군들은 귀찬은 존재가 된 납북인사 400여명을 이곳에서 학살하였다. 같은 시기에 문산역 북방8km지점장터 에서도 약600여명 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1951년9월 시점에 집계된 파주군의 피해상황을 보면 인명피해 민간인 남자 1,328명 여자 674명, 피해를 입었다.

건축물은 금융조합4동, 상가건물 7171동, 전소되고 214개 도정공장 중 53개가 전소되고 5개가 반소되었으며, 종교단체 소속건물 12동중 4동이 전소되고 2동이 반소되었다. 금전으로 환산하면 당시금액으로 약170억 원의 피해와 어선10척 포함하여 많은 자동차가 피해를 입었다.

파주에는 장단군 출신의 피난마을 위해 집단거주지가 여러 곳 마련되었다. 1953년7월10일 교하면 상지석리에 360세대 2,212명을 정착시켜 임야96,4정보를 밭으로 개간 하도록 한 것이 그 중하나이다. 이곳 상지석리의 개미 골이란 마을 이름은 이들이 정착한 이후 근면절약을 신조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부유한 마을로 만들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1954년10월11일 교하면 야당리 에도 70세대, 아동면 금능리 165세대, 1954년12월 30일 조리면 장곡리 130세대, 1955년10월15일 아동면 금촌리 178세대 정착하여 자리를 잡고 살아오고 있다.

동족상잔인 전쟁에서 인민군이 처 들어와 집을 수색하여 반공인사와 국군 낙오병 그리고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주민들을 사살하고, 납치해가던 납북인사 400명을 사살하고, 수복 후에는 부역자 처리라고 하여 2000여명을 사살하는 등 인민군에게 죽고, 수복 후 부역자 처리에서 경찰서장과 치안대장의 재량권으로 “인민군 강압에 못 견뎌 부역한자 가족 50여명을 묶어 밤을 틈타 동굴로 끓어 가 총과 죽창으로 학살한 후 버려진 주검들을 5차례나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인민군에게 학살당하고 수복 후에 부역했다고 우리 측에게 죽음을 당했다.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킨지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남한을 점령하기위해 핵을 만들고 주민들은 굶어 죽고 있어도 전쟁무기를 만들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우리는 6.25전쟁을 상기하고 철저한 방어로 동족상잔의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않토록 막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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