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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봄 맞이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하기 좋은 아리랑고개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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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봄 맞이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하기 좋은 아리랑고개로 오세요"
  • 김현아 기자
  • 승인 2019.03.12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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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고개.

아리랑고개의 유래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아리랑고개는 좌절과 시련의 역사, 그리고 이를 극복한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아리랑고개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넘던 고개였고, 눈물을 흘리며 걷던 고개였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실존의 고개이든 상징의 고개이든 아리랑고개가 많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져 민족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아리랑고개는 돈암사거리를 기점으로 해서 서쪽으로 동소문동 동쪼족으로 동선동을 지나 돈암동, 정릉길과 교차하는 아리랑 시장 앞까지 폭 15m, 길이 1,450m의 가로명이자 고개 이름도 된다. 아리랑 고개는 서울 시내 249개 가로명 가운데 길이 아닌 고개를 부르는 유일한 도로다.

 

아리랑고개의 명칭은 이름 그대로 이 도로에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유서깊은 아리랑고개(일명 정릉고개)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 유래로 1935년 일제강점기에 요리업자들이 고급 요정을 꾸며 손님들을 끌기 위해 민요 ‘아리랑’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 여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항거 민족정신을 형상화한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 선생이 영화 ‘아리랑’을 촬영했다고도 전한다.

 

이를 기념해서 매년 아리랑 축제를 개최해오고 있으며 1997년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워 테마공원조성, 아리랑 시네센터, 아리랑 정보도서관 등을 설립,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쉬는 거리로 탈바꿈했다. 아리랑고개 곳곳에 쉽터와 나운규 소공원 등 휴식 공간이 조성돼서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주변 볼거리 소개

 

▲ 매듭장 무형문화재 제13호

◈ 매듭장ㅣ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은 끈목(다회)을 사용해서 맺고 죄는 방법으로 여러가지 모양을 만드는 수법이나 그 만들어진 형태를 말한다. 매듭은 섬유가 갖는 특수한 결정인 습도, 온도의 문제와 대부분 손으로 매듭을 맺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의 전해오지 못하는 실정이다. 

 

매듭을 맺는 기법이나 염색법은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달돼서 다시 일본으로 전해진 역사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우리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대전회통 공전’에 각 분야의 장인을 궁사에 예속시켰으며 한성 관궁과 사에 속해있는 경공장에 매듭장이 속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공조등 대전상궁도 틈틈히 매듭일을 했고 민가에서도 인기가 많아 50여년 전에는 서울지역 대부분이 실, 끈 매듭의 본고장이었다. 

 

매듭은 끈의 색감, 굵기, 맺는 방법에 따라 형태가 다양해서 기초적인 단추매듭에서 도래, 연봉, 나비, 벌, 가지방석매듭등이 있다.1900년대까지는 끈목을 만드는 비단실을 천연 염료로 했으므로 단정하면서 중후한 느낌을 준다. 또 완성된 매듭은 앞면과 뒷면이 같고 왼편과 오른편이 대칭을 이루며 수직적으로 연속돼서 균형미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복잡한 매듭이라도 중심에서부터 시작돼서 그 매듭의 중심밑에서 끝나 끈목의 결을 바로 세우며 올을 따라 조금씩 죄어 나가므로 질서미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매듭은 서양의 것과 매우 다른데 이는 다양한 결구에서 표현되는 독자적인 조형감각과 미묘한 색채의 조화에서 얻어지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성북동 81-2에 거주하는 김은영씨는 매듭장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 만해 한용운 심우장.

◈ 만해 한용운 심우장(萬海韓龍雲尋牛莊) 

 

 기념물 제7호

 

심우장은 3.1운동 때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1933년에 짓고 만년을 보낸 곳이다. 한용운 선생은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중국에 망명해서 방랑 하다가 1913년에 귀국해서 불교 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펴냈으며 1916년 월간 을 발간 하는 등 3.1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1운동으로 피체돼서 복역 한 후 1926년에 시집 을 펴낸 뒤 신간회에 가담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월간 를 인수해서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사상 고취에 진력했다. 1937년에는 항일 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조종자로 체포됐다.심우장을 짓게된 경위는 3.1운동으로 3년 동안의 옥고 끝에 출옥한 한용운선생이 성북동골짜기 셋방에서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 때 金碧山 스님이 자기가 초당을 지으려고 송림 속에 사둔 52평을 드리겠으니 몇 간 집을 지어 보라고 권유 했다. 

 

그러나 집 지을 1000원 정도의 돈이 없어 주저했는데 부인 유씨(兪氏)의 소지금 약간에다 조선일보사 방응모(方應謨)사장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외에 금융조합에서 대부를 받아 대지112.99평, 건평17.8평 규모의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용운선생은 남향의 집터를 마다하고 그 반대편 산비탈 북향한 곳에 집을 앉힌 것은 일제의 총독부와 등진 곳에 자리를 정한 것입니다. 한용운 선생은 집을 짓고, 그 이름을 尋牛莊 이라 했다. 

 

정면 4간, 측면 2간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 기와지붕을 이룬 민도리 소로수장 집에서 한용운 선생은 광복 1년 전인 1944년에 중풍으로 운명할 때까지 살았다. 현재 한용운 선생이 서재로 쓰던 방에는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심우장 이라는 이름은 한용운 선생의 아호 중에 만해, 오세인(五歲人), 성북학인(城北學人), 목부(牧夫), 실우(失牛) 등이 있는데 그중의 목부는 소를 키운다는 뜻인 바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모든 사람들이 가야할 왕생(往生)의 그 길을 멈출수 없음을 나타내는 의미 심장한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심우장이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 한 것으로 그의 수양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집을 지을 당시 소나무 숲에 지어진 이 집은 매우 한적했다. 한용운 선생은 청빈한 가운데 정원에 많은 화초를 가꾸는 것을 즐기었는데 지금도 당시에 손수 심은 향나무 한그루가 높이 자라고 있어 옛주인의 꿋꿋한 절의를 말해 주는 듯 하다. 

 

이 집을 통해서 온 국민이 3.1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아울러 한국 근대사의 일맥을 주지시키기 위한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편 1965년에 한일 협정이 체결 되면서 심우장의 건너편 대교단지(大敎團地)에는 일본 대사관저가 자리잡음으로써 이 집을 지키던 한용운 선생의 외동딸 한영숙씨가 이집을 떠나 이사하자 한 때 만해사상연구소가 사용했다. 현재는 성북구에서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매입해서 복원공사를 진행 중이다. 

 

▲ 간송미술관.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 간송미술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 성북초등학교 정문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이 있다. 간송미술관은 북단장(北檀莊)이라 부르는 곳에 고 전형필(全鎣弼)선생이 1938년에 설립했다. 

 

이 미술관은 대지가 4,000평으로 도시속에 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주위가 한적하고 조용하다. 미술관의 중심건물인 보화각에는 전형필 선생이 평생동안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돼서 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제일의 고서화 소장처로서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서 발족한 이래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으며, 전시회 개최시에 ‘간송문화’라는 도록을 발간하고 있는데 1998년 10월에 제55호를 내기에 이르렀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및 보물급 등의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한국 미술품 소장 미술관으로서 미술사 연구인의 메카라 할 수 있다. 

 

▲ 북악산도시자연공원.

◈ 수려한 자연과 문화의 결합 북악산도시자연공원’

 

수려한 자연과 문화적 요소의 결합 경복궁의 진산(鎭山)인 북악은 높이 342km에 이르며 화강암이 주를 이룬 돌산으로, 산능선을 따라 조성된 성곽 쥐위로 수목이 가꾸어져 있다. 특별히 소나무는 조선 개국 초부터 특별 보호 대책을 세워 관리됐다.

 

 조선조 내내 잘 보존돼서 온 소나무 숲은 일제 강점기 이후 숲이 방치되면서 능선 주위에만 주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북악산은 근 40년간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은 덕분에 식물들이 잘 보존된 천연의 공간이 됐다. 

 

지금 자라고 있는 식물은 208종류이고 그 중 나무는 81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키큰 나무(고목류)로는 소나마, 팥배나무, 떄죽나무, 산벚나무 등이 있고 키 작은 나무(관목루)로는 진달래, 철쭉, 쥐똥나무, 국수나무 등이 있다. 바늘잎나무로는 소나무가 대부분이며 넓은잎나무는 참나무 등 여러 종류가 섞여 자라고 있다. 

 

그외 성곽 주변에 아까시나무, 은수언사시나무, 리기다소나무 등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해서 심은 나무와 최근 조경주로 심은 스트로브잣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팥배나무 군락은 숙정문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북악 특유의 식생이다. 팥배나무를 비롯한 새 먹이가 될 수종이 많기 떄문에 야생동물로는새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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